보살(菩薩)이라함은 보리(菩提)즉, 불타와 동등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니 세속 말로 구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살의 진면목을 알려면 몇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보살행을 근본으로 하여 대승불교의 사상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일면을 봐야합니다.
소승에서는 인생에 괴로움이 있는 것은 욕이 있기 때문이니 고를 초월하려면 욕을 멸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주로 산간에 은둔하여 독선기심하는 수행법에 의존합니다. 대승에서는 아욕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는 점은 소승과 다름이 없으나 욕은 또한 무한생명의 불타의 경지로 가는 발판이 되는 것이니, 보살은 중생의 고를 구제하기 위해 산에 은둔하지 않고 도리어 고통의 구렁텅이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수행과정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관음보살의 32응신이나 지장보살의 지옥미제 서불성불(地獄未濟誓不成佛 )이 다 그러한 수행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보살들은 고의 수렁에서도 고에 동화되지 않기 때문에 법화경에서는 보살행을 처렴상정(處染常淨)이라 합니다.
이 대승사상에서 우리는 불교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며 보살행은 곧 실천적인 수행에 그 본의가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보살행을 최초로 구족하신 분이 바로 원효스님이시며, 원효스님의 실천수행을 높이 받들어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면 동해바다 전부가 관음으로 보인 의상조사의 깨달음도 결국 이질의 소식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불교의 세계관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네 개의 세계가 있는데 그 중 우리가 사는 지역은 남섬부주라 하였고 그 반대쪽의 북구로주는 유토피아인데 비해 남섬부주는 고(苦)가 많은 지역입니다. 그로써 불교의 인생관은 근본 고관(苦觀)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관은 세계의 진상을 고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초탈하여 보다 높은 진여의 경지에 도달하느냐는 데에 생의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때문에 부처님은 우리에게 발고여락(拔苦與樂)하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가 많은 남섬부주의 인생은 근본 두 가지의 큰 모순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존재로서 자연의 혜택 아래 살면서도 부단히 천재지변의 위협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정신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욕구와 자유를 갈망하나 폭정이라든가 사회적인 제약이 이를 파괴하고 앗아갑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제거하기 위해 인간은 개척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을 발달시켜 자연의 혜택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정치를 개선해서 인권을 존중하는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도 문화에 반비례하여 어째서 자살자는 속출하고 감옥은 범람해서 인간은 퇴폐의 길을 가고 있을가요. 인간사회의 문화발전이 삶을 향상시키고 고통을 덜어서 생활가치를 높여 주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하나 이러한 물질문명만으로 인생의 고는 해결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를 잊기 위해 극도의 향락을 일삼고 심지어는 여자와 술과 마약까지도 그 도구로 이용합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도가 될 수 있을까요. 불타께서는 발고여락의 대도를 가르치시되, 감각적인 욕구를 억제하여 아욕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욕을 버리는 길은 생활의 기피가 아니라 온갖 망상으로 쌓은 가공의 탑을 무너뜨리고 활연한 정신적 자유경을 보라는 말씀이니, 반야 설법에서 보여주신 진공묘유의 경지도 필경 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고의 방석에 앉아 있으나 한 마음 평온하면 화작작조두두물물(花灼灼鳥頭頭物物)이 진면목이 아니것이 없음이며, 인생이 어찌 반드시 괴로움만 있겠습니까.
보살행으로 모든 업식을 지우고 실천함으로서 대 자유인이 되시길 발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