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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수행 0
 작성자: 최고관리자  2012-07-11 13:28
조회 : 13,358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같지 않은 점으로 두드러진 것은 교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장 중요한 종지(宗旨)가 교설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 점일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수단이 언어인 것처럼, 불타의 교설 또한 언어를 통해 표현되어진, 여래 경계의 극히 작은 일부분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래의 경계를 표현한 이 언어는 비록 부처님의 언설일지라도 부처님 스스로의 경계를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수보리존자로 하여금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은 개불가취(皆不可取)며 불가설(不可說)이며…’라고 말하게 하신다. 언설은 곧 언어이전의 만기(萬機)를 총섭하는 경계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불입문자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하고 견성성불 하는 것을 최고의 신행으로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경계를 바로 우리의 경계로 할 수만 있다면 구태여 부처님의 ‘마음’을 번역 초록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교설에 의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불교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인이라고 불려지는 요새 사람들의 근기가 옛 사람들에 비하여 더 나을 것이 없고 도리어 뒤지고 있는 일이다. 죄만 늘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지혜가 발달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진실한 의미로 수식 될 요새 사람들은 교외로 별전(別傳)하는 불조(佛祖)의 심등을 바로 증득하려는 진지한 대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열심히 한다는 것이 말씀에 매달려 수박 겉 핥기에 머무는 경향이다.

이름이 붙여져서 불교이지 불교가 결코 불교만의 불교가 아니 듯이, 선(禪) 또한 어디 불교만의 선이겠는가 만은,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대도(大道)임을 모르고 불교인만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인격의 기초를 닦는 데에는 선보다 나은 것이 없다. 선은 바로 인간의 번거로운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정리해 주기 때문이다.

“밭이 있으면 밭을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한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은 항상 그 마음의 주인에 따라 기쁨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마음이 갖는 다양성과 변화는 실로 측정하기 어렵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등장시키는 이 마음은 결국 불교 수행의 묘미(妙味)이기도 하다. 착한마음, 나쁜 마음의 선악개념을 떠나 삼라만상을 통 채로 담아버릴 듯한 이 마음의 세계는, 끝내 열반과 하나가 된다. 어떠한 세상사도 도를 이룬 사람 앞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 정체를 확연히 노출 시킨다.

수많은 선문답은 불교를 배우는 특이한 기쁨을 주고 있고, 그 마음을 찾는 수행자들에게는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인지도 모른다. 번뇌가 더 이상 번뇌가 아닌 경지, 그리고 참마음이 기실 실체가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마음이다.

관악산 연주암을 찾는 모두에게 권하노니, 우리 본연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며 어디에서 찾고 닦아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보자. 마음을 닦는데 어찌 나이의 고하를 헤아릴 것인가. 초등학교의 과정에서부터 인간의 터를 닦는 선수련을 하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꼭 경계해야할 것이 하나 있다. 선(禪)에만 집착한 나머지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敎)를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않된다. 선과 교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이니 가르침 또한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교(敎)에는 부처님의 진리와 가르침이 담겨져 있으며 이를 통해 신심과 원력을 발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지도 못하고 선만 고집한다면 모래로 밥을 짓겠다고하는 논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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