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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24 09:36
[주요인물] 연주암 소개 HTML페이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624  

연주암, 또는 연주대와 관계했던 주요 인물은 승려보다 단월세력에 더욱 비중있는 인물들이 상당수 보인다. 스님 가운데는 창건주로 전하는 의상스님 이외에 불교사에서 자취를 뚜렷하게 남긴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에 들어와 중창을 주도하였던 몇몇 스님들이 있지만, 역시 크게 주목받은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연주암의 주요 인물을 살피는 자리에서는 주로 단월세력에 속했던 재가 불자들에 관해 정리하고자 하며, 근대 이후의 스님들 즉 완송.행문.경산.재예.교훈스님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장이 밝혀질 때가지 서술을 유보하고자 한다.

이들 세 인물이 연주암의 사찰 이름 유래에 관계된 정확한 배경은 찾기 힘들다. 이들에 관한 많지 않은 자료로써는 세 인물이 함께 은거 생활을 하였다거나,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연주암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된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찾아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조선 건국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이른바 고려의 충신계열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남을진(南乙珍)의 경우 정확한 생몰년도를 알 수 없으며 본관이 의령이며 부친은 지령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남천로(南天路)이다. 남을진은 1368년 현량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정몽주.길재 등 당대의 충신들과 교유하다가, 고려말 정치 상황이 혼탁해지자 양주 사천현에 있는 봉황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조선 개국 이후 태조가 그를 사천백(沙川伯)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니 신하된 자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며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감악산의 석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으며, 이후 영조 때에 사천서원에 제향되기도 하였다.

다음, 서견(徐甄)의 경우도 역시 정확한 생몰년도를 알 수 없다. 1391년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다른 간관들과 함께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곧 정몽주가 피살되고 이성계와 조준.정도전 등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지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강득룡(姜得龍)은 태조의 처남으로 전해지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성계의 계비이자 방번(芳番).방석(芳碩) 두 왕자의 모친이었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와 남매간이 아니었을까 보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여 본다면 강득룡이 정치 주도권에서 밀려난 후 방랑생활을 한 듯한부분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 보인다.

위 세 인물은 앞서도 말하였지만 조선개국이라는 역사의 변혁기에 소외되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고려 충신들과 함께 전 왕조에 대한 충성의 미담으로 연주암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연주암과 이들 세 인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연주암을 지켜보던 후대인들의 정서가 표현된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찰측 자료에 의하면 두 인물이 연주암과 관계를 맺게 되는 시기는 1411년이었다고 한다. 즉 부왕 태종이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궁중을 나와 이곳에서 한동안 거쳐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태종과 두 대군, 그리고 충녕대군 즉 세종에 관계된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특히 장남이었던 양녕이 왜 파격적인 행동으로 세자의 지위를 놓으려 하였는지. 또는 왜 태종이 충녕대군을 왕으로 계승시켰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각종 설이 분분하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주변의 온갖 음해 공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끈한 우애를 나누었음을 볼 때 이같은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의 정치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살필 수는 없으므로, 조선시대 불교 중흥에 특히 많은 공헌을 하였던 효령대군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두 인물이 연주암을 중창하고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효령대군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커보이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이고, 초명은 호(祜)였으며 자는 선숙(善淑) 호는 연강(連江)이었다. 태종의 둘째아들로 1396년에 태어났다. 1407년 효령군에 봉해지고, 1412년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그의 생애는 조선초기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평가될 만큼 왕자의 신분보다 불교인의 시각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학자들의 온갖 비난을 무릅쓰면서 생애 전기간에 걸쳐 불교 중흥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승적에 올렸을 정도로 투철하고 맹렬한 신앙심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했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432년 그는 한강에서 7일간에 걸쳐 수륙재(水陸齋)를 개최하였다. 이어 1434년 4월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하였고, 다음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흥천사 탑전의 수리를 명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다. 1452년에는 용문산 상원사(上元寺)에 종을 주조하여 봉안하였으며, 1464년 회암사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개최하고 그해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직접 활동하였다. 이어 1465년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였고, <<원각경>>을 수교(誰校)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사찰에 칩거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던 것을 알려진다.

위의 단편적인 내용을 통해서도 그가 어느 정도로 조선 불교 중흥에 기여했는지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 극심한 배불정책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 효령대군의 이러한 활동은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생애 전기간을 통하여 꿋꿋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에 보여준 그의 관심과 지원은 조선 불교가 명맥을 유지해가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연주암에 관련한 부분도 단순하게 왕위에 대한 미련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효령대군의 독실한 신앙과 불교에 대한 지원책 등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연혁에서 보았듯이 명성황후는 1888년 만오천냥의 돈을 내어 연주암 중창을 도왔다. 조선시대 역대 비.빈들의 불교 신앙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한국 근대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명성황후의 불교 지원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1888년은 완전히 국정을 장악한 민비가 활발한 외교 협상, 그리고 대원군세력의 완전 제거 등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어떠한 이유로 연주암 중창을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성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때에 연주암과 관련을 맺는 것은 연주암 입장에서는 사찰의 위상을 높이고 면모를 일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긴의 중창 불사는 거의 연주암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불사였다. 연주암과의 관계뿐 아니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명성황후와 불교의 관계는 앞으로 좀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과제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