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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측 자료에 의하면 두 인물이 연주암과 관계를 맺게 되는 시기는 1411년이었다고 한다. 즉 부왕 태종이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궁중을 나와 이곳에서 한동안 거쳐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태종과 두 대군, 그리고 충녕대군 즉 세종에 관계된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특히 장남이었던 양녕이 왜 파격적인 행동으로 세자의 지위를 놓으려 하였는지. 또는 왜 태종이 충녕대군을 왕으로 계승시켰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각종 설이 분분하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주변의 온갖 음해 공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끈한 우애를 나누었음을 볼 때 이같은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의 정치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살필 수는 없으므로, 조선시대 불교 중흥에 특히 많은 공헌을 하였던 효령대군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두 인물이 연주암을 중창하고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효령대군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커보이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이고, 초명은 호(祜)였으며 자는 선숙(善淑) 호는 연강(連江)이었다. 태종의 둘째아들로 1396년에 태어났다. 1407년 효령군에 봉해지고, 1412년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그의 생애는 조선초기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평가될 만큼 왕자의 신분보다 불교인의 시각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학자들의 온갖 비난을 무릅쓰면서 생애 전기간에 걸쳐 불교 중흥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승적에 올렸을 정도로 투철하고 맹렬한 신앙심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했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432년 그는 한강에서 7일간에 걸쳐 수륙재(水陸齋)를 개최하였다. 이어 1434년 4월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하였고, 다음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흥천사 탑전의 수리를 명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다. 1452년에는 용문산 상원사(上元寺)에 종을 주조하여 봉안하였으며, 1464년 회암사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개최하고 그해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직접 활동하였다. 이어 1465년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였고, <<원각경>>을 수교(誰校)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사찰에 칩거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던 것을 알려진다.
위의 단편적인 내용을 통해서도 그가 어느 정도로 조선 불교 중흥에 기여했는지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 극심한 배불정책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 효령대군의 이러한 활동은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생애 전기간을 통하여 꿋꿋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에 보여준 그의 관심과 지원은 조선 불교가 명맥을 유지해가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연주암에 관련한 부분도 단순하게 왕위에 대한 미련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효령대군의 독실한 신앙과 불교에 대한 지원책 등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